소설을 읽기 전에 굉장히 많은 이슈가 되었던 책이었다. 작품성 자체로도 굉장한 이슈가 되었겠지만 한국과 일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책 내에서의 고증 때문에도 이슈가 되었었다.
뭐가 되었든 개인적으로 그런 자잘한 이슈들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고, 이런 책이 있고, 작품성이 좋다는 사실 정도만 인지를 하고 있었더랬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일본과 한국의 이야기를 한다기에 일제강점기 시대의 일본이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줄로만 알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통 일제강점기 하면 떠오르는 어떤 생각들과 이미지들이 있지 않은가? 특히 한국인들은 그럴 것이다.
그런 한국인으로서 일제강점기를 듣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이 소설에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신선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일제강점기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책이 분명 아니었다.
먼저 이야기는 한국, 부산에서 시작한다. 책을 읽은 지 꽤 되어 책의 리뷰를 쓰는 현 시점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대로라면 말이다.(가끔 사투리가 부산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섞여있어 읽으면서 조금 헷갈렸다.) 그리고, 이 책은 그저 단막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어떤 시점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삼대에 걸쳐 풀어냈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인간적인 면을 다룬 소설을 읽은 게 얼마만인지 싶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또한 소설 안에서 인간적인 면을 풀어내지만 그는 조금 더 어떤 영적인 것에 집중하는 작가였고, 그 이외에 관심을 두고 잡다하게 읽은 책들은 모두 사업 관련 책이거나 자기 계발 서적이었으니. 인간의 감정, 그리고 개개인의 이념들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상상해보지 않으며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살고 있었다.
(아마 이런 소설들을 많이 읽지 않았고 이런 분야에도 관심이 없으니 극 T 가 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저 내가 책을 접하는 애플리케이션에
(짤막한 일화를 이야기하자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e북 서비스였는데 지금 서비스가 개정이 되어 요금을 결제하고 사용해야 한다, 그래도 가격이 1년에 2만 원 정도라 전혀 부담이 없어 신청하려고 했지만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나에게 다시 내가 다니던 '그' 대학교에 신분증을 가지고 '직접 방문해서' 신청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가격으로만 따지자면 거의 열 배는 비싼 교보문고 샘을 구독하고 있긴 하다. 그래도 학교 e북 신청을 하려고 십만 원 가까이 되는 차비를 결제하고 다시 갔다 오는 거나, 한 달에, 마침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어서 프리미엄으로 구독할 수 있었다, 만 원 꼴로 샘을 구독하는 거나 마찬가지겠거니 싶었다. 물론 다시 내 대학교가 있는 지역에 갈 일이 생긴다면 잊지 말고 들러서 요금을 기꺼이 결제하고 오리라.)
항상 떠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고, 아직 기업의 개념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 내게는 그 무언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게 어려워 종종 생각이 막히게 되었다. 물론, 그 책도 후에 회사가 더 커지게 된다면 반드시 적용시켜 보고 실험해 보고 또 더 나은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라는 것은 확실히 이해가 되었지만 아직은 어려운 듯했다. 어쨌든, 그래서 머리를 조금 식히고자 조금 더 가벼운 소설책을 읽자 하는 생각에서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설을 읽으면 삶에 대한 전반적인 철학과 시선을 알게 모르게 전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리고 역시나 이 소설 또한 그랬다. 삶에 대한 어떤 통찰을 하고 싶을 때, 다른 어떤 서적들보다 소설책을 선호하는 이유다.
삼대라고 한다면 거진 백 년의 시간이 아닌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그 시간 동안의 일을 다룬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사는 동안에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나는 이 파친코라는 소설을 쓴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아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일반화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 하나하나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나이대의 어떤 모습일 것이다라고 하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에서 사람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을 따르는 인물이나 상황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은 집에서 형제로 자란 두 사람들도 그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아니, 극단적으로 달랐다.
프랑스어를 제일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 가장 처음으로 익숙해지는 문구가 하나 있다.
ça dépend
이게 내가 프랑스의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고, 사실 그전부터 외국 문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미국에서는 각자의 개성을 중시한다. 그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와 같아지기 싫어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그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물론 이게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그런 특성 덕분에 이런 부분에서 소설을 끝마친 후 나는 다시 한번 개개인의 모습을 눈여겨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선자가 아닐까 싶다. 선자는 훈이와 양진의 딸이다. 그리고 훈이와 양진은 선을 봐서 결혼하게 된 부부다. 특히 훈이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다. 입술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태어난 사람이다. 구순구개열이라고 한다. 이게 과학적으로 유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책에서 훈이와 양진은 자신의 아이들 또한 구순구개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훈이와 양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하는 부부였고,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아이들을 그 누구의 사랑도 부럽지 않을 사랑으로 길러냈다.
파친코를 읽으면서 가장 애틋하지만 가장 안타깝고 특별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커플이었다. 처음부터 한수와 선자는 떳떳하지 못한 커플이었다. 물론 소설의 끝까지 이들은 떳떳하지 못한 채로 남게 되었지만. 처음에 그들이 서로 사랑했을 때는 서로 몰래 만남을 이어갔다. 그 어떤 통신 장비도 없었을 그 시절 서로 바닷가에 왔다 가게 된다면 바위에 표시를 해서 자신이 왔다갔음을 알리며 만남을 이어나갔다. 숲 속에서 사랑을 나눴고 그마저도 떳떳하거나 편하지 못해 생채기가 났던 사랑이었다. 한수는 선자를 사랑했다. 끝까지 사랑했다. 선자는 한수에게 실망을 하게 되어 더 이상 한수를 사랑하지 않았다. 한수는 떳떳하지 못한 사랑도 진심이었던 사랑이었고, 선자는 떳떳하지 못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한수는 자신과 선자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 또한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보살펴주었고 삶의 끝자락에서까지 선자를 사랑했다. 선자에게 한수는 개새끼일지언정 글쎄, 독자로서의 시선에서 개새끼는 선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선자가 한수의 아이를 갖게 되었고 역시나 그것은 선자의 삶에서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고 굉장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내가 봤을 때 선자라는 인물은 어떤 사회적 관념을 중시하는 인물로 보였다. 후에 소설을 읽으면서 선자와 한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인 노아가 어떻게 그렇게 올곧은 성격을 가질 수 있었던 걸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그게 조금 명확해진 것 같다. 백이삭의 영향도 컸겠지만 유전적으로는 선자의 영향 또한 만만치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선자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백이삭이 나타났다. 백이삭의 구세주는 하느님이었고, 선자의 구세주는 백이삭이었던 것이었을까. 그래도 백이삭은 선자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노아도 진심을 다해서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그러나 너무 이상만을 바라보는 인물이었다. 그의 형인 백요셉 덕분에 모든 가족들이 먹고살 수 있었지만, 백이삭은 가족들의 그 어떤 생계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찌 보면 선자의 명예를 되살려주었지만 오사카로 데려와 보장되지 않은 삶을 살게 한 무책임한 인물이었다.
현시대에 이 둘이 존재했다면 그리고 만약 이 인물들이 소설에서의 철학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면 내가 제일 경멸했을 백요셉, 그리고 현시대의 내가 가장 좋아했을 인물 경희.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물론 백요셉이 나빴다고는 할 수 없다. 시대적인 관념에서 여자가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모든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 뼈빠지게 일을 하지 않았던가. 이 소설에서 가장 책임감 있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 백이삭의 책임감까지 백요셉이 가지고 갔던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물론 상황적인 부분 또한 백요셉을 그 누구보다도 책임감 있게 만들어 주었겠다. 여자가 일을 하면 절대 안된다는 철학 하에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경희가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게 백요셉을 죽음으로 이끌었고 가정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물론 이런 시련은 가족이 더 부유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어떤 계기였지만). 만약 백요셉이 현시대를 살고 있었다면 그는 몇 번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식솔들을 끝까지 먹여 살려 부유한 가정까지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인물이다. 아이는 없지만 만약 아이가 있었다면 그 어떤 아버지보다도 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경희는, 분명 자기 주도적인 인물이었음은 기억이 나지만 왜인지 특별하게 각인되는 어떤 이미지가 없다. 그저 그 시대에서의 멋진 신여성 정도라는 이미지 정도로만 남아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를, 그리고 아마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노아. 노아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개였고, 하지만 그건 갑작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그 갑작스러운 전개는 잠시동안 책을 덮어두게 만들었더랬다. 하지만 완전히,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 감정이, 그 실망이 그 좌절이 얼마나 큰 것일지는. 독자인 나의 입장으로서 선자와 고한수가 노아를 찾아간 것은 백번 그를 돕기 위함이었다. 아니면 욕심이었을까. 아니 그래도 사랑이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아니겠는가. 그리고 노아는....아직 이것을 이해하기에는 좁은 나의 시야에서 그는, 완벽주의자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도 얼마나 편협하고 좁은 시야를 가졌는가.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처럼 노아 또한 선자와 고한수를 이해하지 못했고 대학까지 다니며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으나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가장 지식을 사랑한 자이지만 그래서 가장 고지식한 사람이었을까. 선자가 떳떳하지 못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느꼈던 것처럼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출생은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모자수, 어찌 보면 현 한국의 흙수저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인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적어도 나한테는, 모자수는 꽤나 내가 닮고 싶어하는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마음 편히, 또 가장 관심있게 봤던 인물이었다. 파친코라는 사업을 확장시켜 결국은 큰 부자가 되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고,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용기가 있었고 그 어떤 편견도 없었다. 그래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생각이 된다. 부자가 된 그는 그가 도울 수 있는 상황에 언제든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고 그의 아들까지도 훌륭히 키워낼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고 그가 이뤄낸 모든 것이 내가 꿈꾸는 모습이었다. 노아가 그 누구보다 선자를 닮았다면 모자수는, 내가 생각하기에, 누구보다 백이삭을 닮았다. 백이삭에게도 편견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선자와 결혼했고 선자를 오사카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큰 계획은 없었다. 편견 없이, 사회의 시선에 구애 받지 않은 채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했고 그것이 좋든 나쁘든 새로운 삶을 이뤄낸 것은 분명했다.
솔로몬에 대해서는 경희보다도 더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딱히 큰 시련도 없었고, 모자수의 보살핌 아래에서 훌륭한 남성으로 자랐고, 좋은 여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여기에서, 솔로몬이 작가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작가의 힘들었던 시절을 가장 많이 대변해 주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솔로몬은 그렇게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일본 사람들과 어울렸고 일본의 문화와 일본의 교육을 받으며. 물론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한국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일본인이었다. 물론, 한국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었을 테고, 그들의 부모가 한국인이라는 것에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 테지. 그런데 그는 일본에서는 한국인의 취급을 받았고, 그렇게 기다리던 한국에서는 일본인의 취급을 받아 결국 한국에서 여행할 때는 한국말을 한마디도 내뱉게 되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 외국에 거주하는 3세대, 4세대 교포들의 현실일 테다. 그리고 작가는 결국에 이러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외로움과 힘듦을 풀어내는 소설이 아니었을까.
파친코라는 소설을 통해서 나는 개개인의 '타인의' 인생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교포들에 대한 더 넓은 시각과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던 것 같다.
그러면서 또 뜬금없지만 프랑스라는 나라 또한 굉장한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많은 인종들이 섞여 살지만,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다면 프랑스인이다. 아랍인도 아프리카 사람도 아시아 사람도 백인도 모두 프랑스인이다. 물론 Origine이라는 게 있어 그들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어는 존재한다. 하지만 반대로 보자면 한국에는 이 오리진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를 프랑스 사람들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그저 뿌리가 다를 뿐.
파친코를 읽으며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더 커졌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상도1,2,3-임상옥 덕후에 의한 임상옥 덕후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경고 또 경고 (0) | 2023.02.06 |
---|